La unuaj 200 linioj.
1953년 8월 상하이에서 태어났어요
우리 가족은 네 식구였죠
아버지는 광둥 분이셨는데 상하이로 유학을 오셨어요
어머니는 저장 출신이시고요
그러니까 우린 이주민이었어요
타향 출신이었죠
우리 같은 가족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상하이의 복잡한 골목에 모여 살았죠
우리 같은 애들이 뛰놀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었어요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문화 대혁명이 시작될 무렵과
그 이전의 모습이에요
당시 우리는 여덟아홉 살이나 열대여섯 살쯤 됐죠
정말 생생한 기억이에요
이웃끼리도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곤 했거든요
하지만 문화 대혁명이 터지고
가택 수색이 시작되며 다 바뀌었죠
그제야 어느 집은 간첩 집안이고
어느 집은 자본가 집안
어느 집은 혁명가 집안이라는 걸 알게 됐죠
결국에는 혁명가들까지도 박해받게 됐지만요
우리 맞은편에는 자본가 집안이 살았어요
그 건물 전체가 원래 그 집 소유였다고들 했죠
우린 창문 너머로 그 집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훔쳐보곤 했어요
고급 목재로 만든 커다란 식탁이 있었고 하인들도 있었거든요
우아한 예절에 훌륭한 식기까지 갖췄죠
그런 삶의 방식도 문화 대혁명과 함께 끝이 났어요
골목마다 대장 노릇을 하는 남자아이가 한 명씩 있었어요
자기만의 무리도 이끌었고요
싸움을 제일 잘하는 애가 있었는데
타고난 리더였고 다른 애들과도 잘 어울렸어요
그래서 우린 누구랑 놀지 편을 선택해야만 했죠
괴롭힘을 당할지 남을 괴롭힐지가 거기서 결정됐거든요
한편 옆 동네 골목에는 우리를 노리는 애들이 있었어요
마치 전국 시대 같았죠
장자 지역의 한 녀석은
유독 우리만 집요하게 괴롭혔어요
우리는 다중리에 살았고요
쉬둥리 같은 다른 동네라고 상황이 다르지 않았을 거예요
아무튼 어느 동네에나 불량배 같은 녀석들이 있었어요
맨날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화해하고는 또 싸우는 녀석들이었죠
그게 제 가장 강렬한 유년기 기억이에요
누구 없어?
나랑 싸울 사람?
덤벼!
들어와!
빨리!
누가 나랑 붙어볼래?
내가 바로 캉취안이다!
들어와서 찍어요
제 아버지는 양싱포예요
아버지는 중국 민권 보장 동맹의 공동 창립자셨죠
국민당에 체포된 공산당원과
민주 인사들을 구출하려 하셨는데
장제스가 그걸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그래서 장제스는 비밀 요원들에게
아버지를 암살하라고 지시했고
그게 1933년 6월 18일 아침의 일이었죠
아버지 사무실은 정원이 딸린 서양식 주택에 있었어요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려면 모퉁이를 돌아
도로로 진입해야 했죠
그래서 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났어요
폭발음이었죠
전 타이어가 터진 건 줄 알았어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내밀었죠
우리 차는 지붕을 열 수 있는 차였어요
프레임은 금속이었고 지붕은 두꺼운 천으로 돼 있었죠
하지만 지붕과 프레임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총알을 막아 줄 수가 없었어요
모퉁이를 돌던 차가 갑자기 멈춰 섰어요
왜 그랬을까요?
운전사가 밖으로 뛰어내리는 게 보였어요
도망치려던 거였죠
운전사는 총을 두 발 맞았어요
배와 팔에 한 발씩 맞아서 사방이 피투성이였죠
전 너무 무서워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조차 못 했어요
그 순간 어지러워서 정신을 잃었죠
조금 뒤에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제가 좌석 밑에 누워 있더라고요
아버지가 제 위를 덮고 계셨어요
일어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절 짓누르고 있었죠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어요
전 고작 열네 살이었고 중학교 2학년이었거든요
아무튼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어요
그러곤 아버지를 깨우려 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으셨죠
암살 사건 이후 쑹 부인은 연설을 통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하지만 사실 당시에는 총간사 자리가 비어 있었죠
쑹 부인은 동맹 회원이던 린위탕에게
총간사 대행을 맡아 달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뭐라 했는지 아세요?
그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죠
아무도 나서지 않는 바람에 결국 조직은 해산되고 말았어요
쑹쯔원이 기차역에서 나올 때가 기억나네요
비서인 탕위루와 함께였죠
두 사람은 비슷한 양복 차림이었어요
더운 날이었죠
둘 다 하얀 양복을 입고 파나마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기차가 들어오고 수많은 사람이 내렸어요
출구에 다다르기도 전에 총소리가 났죠
쑹쯔원은 즉각 반응하며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어요
모자도 벗겨졌죠
그렇게 암살은 빗나갔어요
그런데 비서는 한 발짝 내디뎠다가
총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어요
단 한 발이었죠
총알 한 발로 목숨을 잃은 거예요
어쨌든 그 비서에겐 부양할 가족이 있었어요
신혼이었고 아내는 임신 중이었거든요
과부가 된 아내에겐 시련이 많았을 거예요
탕위루, 쑹쯔원 그리고 저희 아버지는
미국 유학 시절 동기였어요
그분들은 화이하이루를 거닐며 카페 찾는 걸 좋아하셨죠
아버지는 절 자주 데리고 가셨어요
당시 화이하이루엔 카페가 별로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디디스 외에는
카페라 할 만한 곳이 거의 없었죠
요즘은 요트가 많이 보이잖아요
저희 아버지는 옛날부터 요트가 있으셨어요
요트 안엔 주방도 있고 넓은 식사 공간에
침실까지 갖춰져 있었죠
서양의 주거용 보트처럼요
딱 그런 모양이었어요
그 요트 외에도 쾌속정이 두 척 있었는데
속도가 엄청 빨랐고 요트 뒤에 매달고 다니셨죠
요즘 경기에 쓰는 그런 쾌속정과는 달랐어요
자동차처럼 앞뒤로 세 자리씩 좌석이 있었거든요
운전대도 차랑 똑같이 생겼고요
우린 그걸 타고 온갖 곳을 다녔어요
가든 브리지 바로 앞까지 갔죠
물살이 거세게 튀어서 수영복을 입고 타야 했어요
아버지는 에어컨을 가장 먼저 들인 분 중 하나였어요
에어컨이 처음 나온 게 1930년대였거든요
아버지는 경극에서 노래도 하셨죠
아마추어 경극 배우로도 활동하셨어요
유명한 배우들을 불러서 함께 연습하곤 하셨죠
그냥 와 주는 것만으로도 돈을 지급하셨어요
구경 온 사람들에게는 조미료 한 캔이나
모기 기피제를 나눠 줬어요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온 건
아버지 연기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조미료나 모기 기피제를 공짜로 받을 수 있어서였죠
그때는 그랬어요
아버지는 경극을 참 사랑하셨거든요
서양 물건을 좋아하시면서도
옷차림은 항상 중국식으로 입으셨어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분이었죠
문화 대혁명 시절에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난 염라대왕을 만날 준비됐다
충분히 잘살았기 때문이죠
좋은 옷들도 미련 없이 포기하셨죠
홍위병들이 유일하게 남겨둔 건
메이이사에서 만든 고급 침대였어요
그 침대는 값이 꽤 나갔지만 아버지는 그것도 팔아 버리셨어요
대나무 침대면 충분하고 이미 인생을 다 즐겼으니
상관없다고 하셨죠
할아버지의 존함은 장이윈이에요
절임 식품 회사를 운영하셨는데 당시엔 보기 드문 일이었죠
그러다 화학 산업에 뛰어드셨고
결국 톈추 조미료 회사를 설립하셨어요
당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톈추는 큰 성공을 거뒀어요
일본산 아지노모토 조미료가 장악했던
중국 시장을 빼앗아 왔죠
하지만 톈추의 원재료는
여전히 일본에서 들여와야 했어요
그래서 원재료를 자체 공급하려고
톈위안 화학 회사를 설립하셨어요
따로 설립하셨죠
이름이 비슷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그리고 화학 공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할아버지가 설립한 또 다른 회사인
톈리 질소 회사에서 사용했어요
1930년대에 이 세 개의 회사를 통해
할아버지는 산업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으셨죠
그 덕분에 항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거금을 들여 독일 지멘스사에서 특수 전투기를
구매하실 수 있었어요
그걸 회사 이름으로 국가에 헌납하셨죠
당신 같은 사람이 날 사랑할 줄 알았더라면
당신에게는 나보다 소중한 사람이 없다는 걸
만약 알았더라면
내가 이걸 진짜 사랑으로 착각한 걸까?
알고 싶지만 답은 오직 당신만이 해줄 수 있어
마음도 없으면서 왜 기대하게 했나요?
2009년 쑤저우허
1842년 8월 29일에 체결된 중영 난징 조약에 따라
상하이항은 외국 무역에 개방될 조약 항으로 지정됐습니다
영국 주상하이 영사 밸푸어가 1843년 11월 17일 부임하면서
상하이는 공식적으로 대외 무역에 개방됐습니다
외국 조계지가 들어서면서 갱단도 생겨났습니다
아버지는 두웨성이셨어요
저희한테 조직 얘기는 절대 안 하셨죠
그저 밥상머리에서는 항상
감사히 먹겠다고 인사하라 하셨죠
남에게 젓가락을 건넬 때는 항상 이 방향으로 주라 하셨고
그게 조직의 방식이라고도 하셨죠
하루는 저를 차에 태우고 나가셨어요
푸싱로에 있는 라파예트팡 입구 근처에 도착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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