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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청
그날 기타가와 환경청 장관은
미나마타병 현장 시찰을 나갔다
미나마타병 문제의 행정 책임자로서
피해자들의 고충을 듣고 중재하는 일을 맡아 온
환경청 기획조정국장 야마노우치 토요노리가
어제 도쿄의 자택에서 자살했습니다
환경청 장관 기타가와
참혹한 심정입니다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나마타 문제에 영향이 있을까요?
그건 별개로 생각해야 합니다
환경청 차관 야스하라
기획조정국장으로서 최근 너무나 바빠서
매일 밤늦게까지
근무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990년 9월 28일
미나마타병 재판에서
도쿄 지법이 국가에 화해를 권고하면서
미나마타병 환자 구제엔 큰 진전이 있을 듯했다
그러나 국가는 화해 권고를 거부했고
국가 측 책임자로서
이를 변명하는 것이 야마노우치의 역할이었다
차기 사무차관 후보였던 엘리트가 왜 자살했을까
유서는 있었을까?
다음 날 신문엔
'가족에게 감사한다'는 메모가 있다고 발표됐다
미나마타병 재판에 대응하며 쌓인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이란 견해가 많았다
야마노우치는 1959년 후생성에 들어가
이후 계속 복지 현장 업무를 맡아 왔다
그가 썼던 시와 소설 복지에 대한 논문 등은
몇 개의 상자에 정리돼 남아 있다
야마노우치에게 복지란 무엇이었을까
남겨진 문장을 살펴보며 그의 53년을 되돌아보자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
1989년 설날의 조간 기사
하라시마 노부코가 화재로 사망했다
당시 그녀는 생활 보호 대상자였고
그녀가 생활 보호에 대해 한 말이 담긴
테이프가 여기에 있다
이 안에서 그녀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녀의 46년을 돌아보며
받는 쪽에게 복지란 무엇이었나 생각해 보자
1945년 3월 10일
도쿄는 공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이듬해인 1946년
전쟁 피해자들을 위해
'구(舊) 생활 보호법'이 제정됐다
헌법 제25조에 따라
국가가 국민의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야마노우치와 노부코 두 사람은
후에 이 '생활 보호'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공습으로 양친과 사별한 노부코를
당시 아카이시초에 살던 하라시마가 데려가
양녀로 삼는다
당시 세 살
노부코는 그때 지어진 이름이다
중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배구부에 들어간다
밝고 활발한 여자아이였다
1957년 중학교를 졸업 후
고교 1학년 때 중퇴
노부코(15세)
나이를 18살이라 속이고
긴자의 카바레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1년 후 우연히 긴자 거리에서 만난 친구에게
카바레의 넘버원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야마노우치의 자택" 12월 4일 오전 9시
야마노우치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나는 사라질 거야'
'그것 말고는 장관이'
'미나마타에 가는 걸 막을 길이 없어'
이렇게 부인에게 말했다
전날은 장관의 시찰 준비로 귀가하지 못했다
야마노우치 토모코 부인
4일 저에게 전화했을 때
그러니까...
관청을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대충 그 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남편이 책임을 지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었죠
남편이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
그 사람의... 그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신념요
그의 상자 속 내용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아버지가 전쟁 중에 중국에서 보낸 편지였다
거기서 아버지는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훌륭한 군인이 되거라 거짓말을 하지 마라'
1946년 4월 아버지는 중국에서 병사
어머니는 야마노우치 가를 떠났다
그도 노부코와 똑같이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말았다
당시 아홉 살
그는 후쿠오카의 조부모 밑에서 유년을 보낸다
그는 시 쓰는 걸 좋아했다
'인형극단의 피리를 쫓는 아이들 발소리'
'높은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다'
창가에 서서
밖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를 듣거나
창문으로 먼 곳을 보는 내용의 시가 많다
도쿄대 학생 신문
1955년 도쿄대에 합격해 상경한다
그의 꿈은 소설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해에 도쿄대 신문은 소설을 모집했는데
응모자 25명 가운데 그의 이름이 있었다
다음 해
그는 세 작품을 응모하나 모두 낙선한다
이 해의 우승자가 오에 겐자부로였다
수상 소감 오에 겐자부로
합격 통지서
1959년 법학부를 졸업하고
상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다
성적은 99명 중 2등
재경부의 엘리트 관료가 될 조건을 모두 갖췄지만
그는 스스로 후생성을 택한다
"언론인, 이토 마사타카" 무슨 이유였을까?
고교 동창생인 이토 씨는 이번 사건에 대해
언론인으로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다리가 좋지 않았어요 관절이 약했거든요
다리를 약간 절듯이 걸었어요
그래서인지 자신을 약자로 본 거죠
그러니 약자와 함께 살아가겠다
자기 자신도 그 서클 안에서 살겠다
그런 각오로 후생성을 선택했다고 봅니다
후생성에 갓 들어갔을 무렵
자신은 천직을 만났다고 하더군요
야마노우치가 입사한 1959년
후생성은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미나마타병이었다
그 지역의 어민 중에 피해자가 속출했다
후생성에선 이미 원인이 유기 수은이라 추측했지만
정부 견해로 확정된 건 9년 뒤였다
어민들의 탄원
1960년대 중반
고도성장과 함께 전차의 시대는 끝이 났다
그에 따라 전국에서 대기 오염이 문제가 되어
국가에선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후생성은 1968년 공해과를 신설했고
야마노우치는 과장 대리로
공해 대책 기본법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상자 속에 낡은 봉투가 하나 있었다
'공해 관련'이라 적힌 그 봉투 안엔
당시 그가 쓴 공해 관련 논문이 다수 들어 있다
공해 관련 환자의 구제는
후생성 시절 그의 원점이었다
1971년
전국적으로 공해 반대 운동이 거센 가운데
환경청이 발족
기대 속에 업무를 시작했다
환경청이 가장 먼저 직면한 것은
미나마타병 인정 기준을 둘러싼 문제였다
1975년
야마노우치는 생애복지과장에 취임
이 무렵 그는 연하장에
간질 협회 모금에 협력해 달라는 문구를 넣었다
간질은 정신병으로 취급됐으므로
그의 관할이 아니었다
일본 간질 협회 마츠토모 료
제 경우는 아이가 간질이고
6천 명이 넘는 회원 대부분이
본인이나 가족이 간질입니다
혹은 간질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도 있고요
그는 그런 입장도 아니고 그냥 행정관이었죠
심지어 자기 소관조차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우릴 지원하고 관심을 가져준 이유라면
간질 문제의 중요함이랄까
백만 명 가까운 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복지 대책도 없고요
그 실태를 이해해서가 아닐까요
일본 간질 협회
복지 대상이 아닌 간질 환자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1979년 야마노우치는
사회국 보호과장으로 취임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로서
생활 보호 행정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야마노우치가 공해 대책에 골몰해 있던 60년대
노부코는 긴자의 가게를 전전하고 있었다
자기 가게를 갖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클럽 '공주' 1962년경
클럽 '공주'에 있었던 게 노부코의 자랑이었다
'공주'는 야마구치 요코가 20살에 연 가게다
노부코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떨어져 자라
고교 중퇴 후 이 세계에서 성공한 야마구치 요코는
노부코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공주'에 노부코를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1976년
노부코는 오츠카의 맨션에서 살기 시작했다
당시 34살이던 그녀는 어떤 남자와 함께였다
맨션 주인인 이도 씨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도 히사오, 이도 에츠코
서민적이었달까요
'안녕하세요!' 하며 들어와서
집세를 낸다거나... 그런 느낌이었죠
위세 좋은 아줌마 같았지?
계약을 한 건 제 남편과 오다 씨라는 남자였지만
달마다 집세는
여자분이 가져왔던 것 같네요
재계약은 1978년 6월이었는데
그때는 오다 씨와 함께가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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