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rst 200 lines.
나는 인어공주
이건 내가 세상에 나오기 한참 전 일이다
엄마 말대로 난 엄마 뱃속의 물고기였고
아빠가 나타난 덕에 인간이 된 거다
엄마, 아빠는 이렇게 처음 만났다
아빠는 늘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 분이라
날 만나러 올 수 없다고 엄마가 그랬지만
그래도 난 아빠를 기다렸다
이게 나다 알리사
첫 번째 이야기
알리사 태어난 지 6년 3개월 8일째
할머니 몇 살 때 할아버지 돌아가셨어?
나 25살 때지
할아버지가 할머니 많이 사랑했어?
그럼
아이스크림도 엄청 사줬고
금목걸이 선물은 네 엄마가 감췄잖니
왜 다시 결혼 안 했어?
할아버지가 돌아오면 어쩌라고
돌아가셨잖아
그래도 돌아올 거야
배 와?
아냐 네 엄마야
할머니 또 까먹었어? 내가 못 살아
배는 한 번 엄마 오면 두 번 불랬잖아
난 그런 얘기 들은 적 없구만
엄마 수요일 알지?
무슨 소리야?
발레 학원 같이 간댔잖아
꼭 간다고 해놓고
난 죽어도 하고 싶단 말이야
그만 좀 보채
그럼 갈 거지?
철딱서니 없는 것
그딴 소리 할 때야?
발레인지 바보짓인지 하다가 다 굶어 죽을래?
바보짓 아닌데
그럼 뭐야?
발레라고? 꿈 깨라
이 집안엔 발레 근처에도 간 인간 없어
나 젊었을 때 춤은 잘 췄다
그럼 수요일에 어머니가 따라가요
수요일은 안 돼
내 팔자야
내가 상전을 두 명이나 모시고 산다
할망구는 허구한 날 곱게 앉아만 있고
딸년은 발레 타령에
나만 뼈 빠지게 일하는데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이렇게 속을 박박 긁어
모스크바에서 멋진 발레 선생님 온대
남자니?
엄마, 발레 그리고 운명의 신호 6살 5개월 23일
엄마, 빨리 해 이러다 늦겠다
보채지 마
거지꼴로 갈 순 없잖니
접수 끝났습니다
이름이 뭐니?
알리사
착하게 생겼구나
오늘 오디션은 끝났으니 내일 와라
내일은 못 오는데
난 발레리나가 될 거야 난 발레리나가 될 거야
결국 발레는 할 수 없었다
내 운명이 아닌가 보다
대신 엄마는 나를 합창단에 넣었다
집 가깝다고 하라나?
어디서 이런 곳을 또 찾을 수 있을까
바다부터 높은 산까지
정다운 땅 한가운데에
길은 자꾸 앞으로 앞으로 달리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라고 외치네
길은 자꾸 앞으로 앞으로 달리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라고 외치네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라고 외치네
당신의 꿈 확실히 이뤄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 안녕, 꼬마야
아저씨, 안녕
빨리 따라와
절대 부두엔 나가지 말랬지
너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어
엄마 말 좀 들어
엄마 아빠 오셨나 봐
어서 오세요
반갑소
방 세 놓으셨나요?
그럼요
젖으셨네
고맙소
바람도 찬데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러죠
받으렴
착한 아이네
어서 들어가요
- 이쪽으로 - 이쪽이요?
날씨가 춥지 않아요?
괜찮아요
아빠 여기서 뭐 하세요?
넌 여기 웬일이니?
아빠 기다렸어요 배가 왔잖아요
넌 발레리나 됐니?
그럼요
아주 예쁘게 컸네
우리 아빠 맞죠?
그렇겠지
아빠 멋있다
엄마 나빴어 죽어버려
알리사
도와줘요 불이에요
알리사
그놈의 의자는 놔둬요
놔두라고요
어머니 좀 데려가
어디 놔야 해?
저 위에
엄마 우리 아빠 언제 와?
아빠? 이 답답한 인간아
너한테 아빠 같은 건 없으니까 그만해
아빠가 잠수 모자 가지러 오실 건데
잠수 모자라니 뭔 소리야?
내 말 못 알아들어? 넌 아빠 없어
네 아비 낯짝이라곤 나도 딱 한 번 봤다
그 개자식은 네가 태어난 줄도 몰라
제발 내 속 후벼파지 마 오지도 않을 인간이야
기다리지 마 아무도 안 온다고
아빠 오면 다 일러줄 거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시민 여러분
'세상 끝'을 구경할 절호의 기회
15분 후면 완전 일식입니다
잠시 후 11시 30분엔 달이 태양을 덮고
여러분께 세상 끝을 보여드립니다
한 분씩 차례차례
관측 장비는 매표소에서 빌리세요
자리는 충분하니 밀지 마시고
임산부, 고혈압 환자는 돌아가 주십시오
'세상 끝'이 다가오자 세계적 디자이너 파코 라반도
일을 중단한 채 떠나기로 했답니다
그래 다 가버려라
세상 끝날 6살 8개월 11일
'세상 끝' 일식이 끝났습니다
다들 자리를 떠나주세요
집으로 돌아가세요
일식이 있던 날 태양은 뜨거웠고
얼마나 더웠는지 모른다
이제 누구도 기다리지 않기로 한 나는
20까지 센 후 영원히 입을 닫기로 했다
영원히
왜 말을 안 하니?
이 꼴 된 지 몇 주째라니까요
일식인지 뭔지 그날부터 이래요
곧 나을 겁니다
오래가면 안 되는데
합창단도 있고
일식이 이 지역에선 아주 희귀한 거라
그 충격 때문에 살짝 맛이 간 건데
시간이 가면 저절로 낫는 병이죠
그 병은 저절로 낫지 않았지만
합창단에는 계속 나갔다
의사 말로는 그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나?
재밌게도 내가 입만 뻥끗대는 게 티도 안 났고
선생님은 내가 노래 잘한다고 칭찬까지 했다
엄마는 나만 보면 화를 내셨지만
난 계속 입 꾹 다물고 살았다
얘들아, 새 친구가 왔다 알리사 티토바
말은 못 하지만 글은 읽고 쓰는 친구야
가서 앉으렴 앞줄 두 번째 자리다
졸지에 장애아가 된 나는 특수 학교에 갔는데
일식 후유증을 겪는 건 나뿐인 듯했다
중요한 변화들 17살 2개월 10일
난 학교에서 인기 최고였고
그때 아주 신기한 마술을 배웠다
소원대로 만들기
아주 간단했다
뭔가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 다 이루어진다
네가 감춘 내 금붙이 내놓으란 말이야
내가 뭘 감춰 이 할마시 노망이네
이 늙은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 얘기는 제발 나중에 해요
1, 2, 3, 4, 5
떠날 거야 1, 2, 3, 4, 5
떠날 거야 6, 7, 8, 9, 10
난 떠날 거야
태풍의 흔적은 참혹합니다
마을은 초토화되고 사상자는 늘어가고 있으며
평생 일군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은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린 어떻게 살라고
집도 없이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어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말해 봐
죄송해요 이 끔찍한 짓 바로 제가 했어요
그냥 떠나고 싶었을 뿐인데
용서해 주세요
찾았다
찾았다 내가 찾던 그 병이야
할머니는 소원대로 금붙이를 주렁주렁 걸었지만
그게 그 녀석들과는 마지막이었다
이사 간다고 엄마가 기차표 사 왔을 때도
어디서 돈이 났는지 관심도 없고
한 가지만 물어보셨다
No comments yet. Be the first to leave 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