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rst 200 lines.
사람의 인생에도 장르가 있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떤 장르인가?
질퍽한 어둠의 세계
누아르?
은밀한 범죄가 동반된 스릴러?
아니면
로맨틱 코미디?
뭐부터 할까요, 형님?
뭐가 됐든 다 흥미로운 인생일 거 같은데
왜 하필 나는 이 장르냐고
기억 상실입니다
환자분은 본인의 이름, 나이, 직업 등
중요한 자서전적 정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해리성 기억 상실증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나온
기억 상실, 바로 그거죠
그러니까요
- 예? - 이…
이게 진짜 되네?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지?
예, 뭐 드라마처럼 흔하지는 않지만…
보통 드라마에서는 이럴 때 어떻게 했죠?
음…
보통은 깨어나자마자 옆에 있는 사람에게
청순하고 멍한 얼굴로
'누구세요?'
라고 하죠
어디 있어요?
내가 청순하게
'누구세요?'
라고 물어볼 사람?
안타깝게도
- 없네요 - 없다니요?
환자분은 2주 전 의식 불명 상태로 이곳에 실려 오셨습니다
발견 당시 혼자 길에 쓰러져 있었다고 했고
몸에 외상의 흔적이 많았어요, 또…
지문 확인도 어려워서…
헉!
이거 왜 이래?
발견 당시부터
지문이 모두 훼손돼 있었습니다
지문 조회가 안 되니까 신원 파악도 불가능했고
보호자한테 연락할 방도도 없었죠
아니, 근데 그러면은
수사를 했어야죠
경찰들도 사고 원인을 파악하려고 애썼는데
발견된 곳이 CCTV가 없는 외딴길이었대요
발견 당시 착용하고 계셨던
옷과 신발에도 별다른 지문은 안 나왔고요
잠깐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자면
으음~
난 2주 전에 길바닥에 쓰러져 있다 실려 왔는데
신원 파악도 안 되고 사고 조사도 안 되고
그 와중에 기억도 없고?
정리를 잘하시네요
그럼 저 이제 어떡해요?
기억이 금방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안 돌아오면요?
안 돌아오면요?
환자분은 신원 미상으로 분류돼서
남은 치료 마치는 대로
국가 시설로 보내질 예정입니다
와우
그러니까 한마디로
엿 된 거네요, 나?
역시 정리를 잘하시네요
좋은 사인입니다
누구냐, 넌?
대체 누구길래
이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실려 온 거야?
아…
내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게 말이 되냐고
어?
근데
예쁘네?
아이고, 아이고
푸훗!
몸매 뭔데?
이야~
복근 뭐야?
복근 왜 있어?
어머, 처음 보는 나지만 너무 마음에 든다
아니, 근데 그럴 거면 그냥 연예인을 하지
너 연예인 왜 안 했니?
그랬으면 내가 기억 상실에 걸렸어도
다른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다 알아봐 줬을 거 아니야
하, 대체 누구였냐
씨, 진짜 내가
누구였냐고, 나는!
아, 진짜~
으흥~
요새는
나라에서 보호해 주는 시설도
아주 괜찮애
그니께
탈북자들도 교육시켜서
직업 찾아 준다잖여
이참에 새 인생 산다 생각허고
거그 가서 소질 한번 찾아봐
- 깜짝이야 - 그래
뭐라도 해 보자
머리 외상으로 기억이 날아간 거니까
- 이 - 다시 자극하면
돌아올지도 몰라
- 그랴, 잘헌다 - 어
기운이 나나 벼
땅콩 줄끄나?
워메, 어짜 쓰까, 워메, 워메
우째, 아가
워메, 워메
아휴
인자 정신이 드는가 벼
아유, 미친 것도 정도가 있지
왜 벼르빡에 대가리를 처박고 그랴
- 에이 - 아이고
처박을 거면 한 시간만 늦게 처박제
예?
그짝이 기절허고
쪼끔 있다가 왔어
애인
드디어 그짝을 아는 사람이 와 부렀다고!
진짜요?
그간 애인이 아주 쎄빠지게 찾아다녔댜
정말요?
어디 있어요? 내 애인이라는 사람
기둘려 봐 금방 올 텐께, 이
애인이
아주 훤~칠하게 잘생겼더만
아유
나는 탈렌트인 줄 알았잖여
아이고, 좋겄다, 하하
아주 내 스타일이여
살았다
그래
이 비주얼에 내가 남자 친구가 없을 리가 없지
이제 드디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다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어, 얘
어?
누구 오는 소리 들리는디?
어머
로또 당첨
할머니
왔냐
네
우리 손주여
모델 햐
인사혀
안녕하세요
어?
또 오는 소리 들리는디?
아휴
얘기 들으셨죠? 보호자분 찾아오셨다고
한번 불러 볼까요?
들어오세요
뭐야?
이 추레한 헝그리 복서는?
어, 어우, 왜 헝그리가 내 앞에…
고은새
정말 아무 기억이 안 나?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응?
네, 모르고 싶어요
하…
나야
안 돼
장태하
안 돼
제발
네 남자 친구
아흐!
아아아악!
감동받으셨죠?
3주 동안 서울, 경기 수도권 모든 병원을
다 뒤져서 환자분 찾으셨대요
분명히
훤칠하다고 되게 탤런트 닮았다고…
크으~ 등짝이 문짝만 한 것이
백일섭이 젊었을 때 같지 않어?
나는 박근형이 같어
젊었을 때 딱 저랬어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자면
내 이름은 고은새고
나이는, 하…
서른세 살에
직업은 엿 공방에서 엿 달이는 알바였고
복싱 체육관 코치인 그쪽이랑
2년째 연애에 동거까지 하면서
결혼을 앞둔 사이다?
어떡하지? 나 진짜 하나도 못 믿겠는데?
일단 내가 서른세 살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도 없이 알바를 했다고?
웹 소설 작가 지망생이었는데 잘 안 풀렸어
그래서 한 달 전부터
우리 할머니 엿 공방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럼 우리가 연인인 건 뭐, 증거 있어요?
아, 아니, 근데
이거는 연인의 증거라고 할 수가 없지
어? 그냥 뭐 지나가는 관광객 두 명이서
나란히 찍은 거래도 믿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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