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rst 200 lines.
이민영
네
장한슬
장한슬
장한슬
- 허도준 - 네
지난번에 제출한 과제는 내가 첨삭해서 저기에 놔뒀으니까
수업 끝나고 다 가져갈 수 있도록 해
네
- 필기했어? - 어
나중에 나 그것 좀 빌려줘
- 보내줄게 - 아, 오늘 학식 그거
돈가스 나온다던데 그거 먹어보자
교수님, 교수님!
저기 이거…
아니, 쓰레기, 쓰레기라니 어떻게 이런 말을…
아, 사실 저요
인플루언서거든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지는 아세요?
제 블로그 구독자만 3만이 넘는다고요
'좋아요'가 하루에 몇 개인 줄 아세요?
그래?
아주 대단하네
그럼 거기는 쓰레기통이겠네?
아니다
아예 쓰레기 하치장이라고 그러는 게 낫겠다
이런 게 쌓여있다면
어, 12개 문단에
문장은 167개
뭐라도 촘촘히 채워놨으니까 글이다 싶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종이에는 문장이 없어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문장이 단 한 개도 없어
그저 온갖 상투적 표현에 싸구려 감상
그리고 남들의 문장을 그저 베껴다가
오려 붙여 넣은 거에 불과해
자기가 뭘 쓰는지도 모르면서 줄줄이 뱉어놓은 걸
그럼 내가 뭐라고 얘기를 해야 되나?
쓰레기 말고 더 적절한 표현이 있다면 나한테 얘기를 해봐
그럼 앞으로 내가 그걸 써보도록 노력할게
하아
나 가도 되지?
재수 없어
진짜 죽여버릴까, 씨 어유, 저 자존감 빌런 새끼
교양필수만 아니면 확 그냥, 씨
허문오 저러는 거 다 자기 콤플렉스 때문이래
에?
술 먹다가 선배들한테 들은 얘기인데
허문오가 쓴 소설책이 딱 한 권 있대
그것도 20년도 더 전에
근데 그다음에 두 번째 소설을 못 쓰고 있다는 거야
쓰고는 싶은데 존나 해봐도 안 되는 거지
그 열등감, 스트레스 그걸 몽땅 학생들한테 푸는 거래
찌질한 새끼
아유, 형님, 오셨어요? 허허
문이 열려 있어 가지고
어, 박 교수 웬일이야? 어제도 봤잖아
아이, 어제는 어제고 오늘도 형님 보고 싶어서 왔죠
아이, 거 또, 형님 소리 좀 좀 하지 말라고
예, 허 교수님, 흐
아이, 저는 그래도 형님이 좋은데, 흐흐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 커피? - 아유, 아니요, 저
좀 전에 했어요
아이고, 이게 뭐야, 정말
형님 고집이
아니, 아직도 호명 출석 하세요, 응?
제가 프로그램 좀 깔아드리고 갈까요? 진짜 편해요
아이고, 됐습니다
난 내 방식이 좋아
그래, 무슨 일이야?
뭐, 용건도 없이 공대에서 여기까지 넘어온 건 아닐 거고
아, 그, 허허
제가 어제 말씀드리려다 깜빡했는데
형님, 그…
김수훈 작가하고 잘 아신다면서요?
누구?
김수훈?
네
대학 동기라고
아유, 나 또 우리 형님한테
이런 엄청난 인맥이 있는 줄 몰랐네
처음부터 알았으면
미리 형님한테 섭외 부탁 좀 드리는 건데
아니, 무슨 말이야?
제가 지난번에 한번 말씀드렸잖아요, 그…
공대에서
매달 문화 이벤트 기획하는 거 제가 맡았다고, 응?
우리 애들이 그냥 정서가 워낙에 메마르니까
- 제가 나서서… - 아, 요지만
아, 예, 요지만, 흐흐
아무튼 그래서 다음 달에
김수훈 작가 모시기로 얘기가 되고 있거든요
그, 이번에 나온 소설 가지고
강연도 하고 또 대담도 나누고
그 대담 형님한테 부탁 좀 드리려고
예?
- 나한테 대담을? - 네
형님 얘기 먼저 꺼낸 게 작가님이세요
김수훈이 내 얘기를?
네
- 뭐라고 하면서? - 아니, 뭐
아무래도 친구가 해주면 편하고 재미있을 거 같다고
그러면 오겠다고 그러시는데
김수훈이 그랬어?
예
아이고, 아이고
선생님, 길 미끄럽습니다 조심하세요
머리기사 잘 뽑아줄 거죠?
아유, 대표님 걱정 마십시오
책이나 더 뽑아놓을 생각 하세요
수훈아
어
- 아니, 저기… - 어! 문오야
야, 잠시만
저, 선생님
저, 먼저 가 계세요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 응, 알았어 - 빨리 와야 돼요
- 진짜 인터뷰는 지금부터인데 - 예
껍데기집 갈 거야
- 그리로 와요 - 예, 예
아이고, 내가 먼저 전화를 했어야 되는데
미안하다
오늘 같이 점, 저녁 먹기로 한 거 아니었어?
난 그렇게 알고 왔는데
그래, 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할 말도 좀 있고
근데 구 선생님이 갑자기 이제 동석하는 바람에…
너도 알지, 구 선생님?
아, 그럼 구영호 모르는 작가가 어디 있어
진짜로는 오늘 처음 뵀네
근데
할 말이 뭐야?
무슨 말?
혹시 전에 내가 부탁했던 거
그 얘기야?
그래
근데 추천사는 안 되겠어
내가 요새 좀 추천사를 남발하는 거 같아서
아, 나, 남발?
내 원고
읽어는 봤어?
아, 봤지
근데 그 얘기는
- 나중에, 응? - 아니, 야, 수훈아
지금 얘기해 줘
어땠어? 지금 말해봐
하아
흠…
잘 모르겠더라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쓰읍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할 얘기가 없으면 그냥 안 해도 되지 않나?'
그냥 그렇게 살아도 괜찮잖아
근데 무엇보다도, 너
문장 공부부터 다시 해야겠더라
그래서 첫 문장을 쓰는 게 중요한 거야
첫 문장을 쓰는 순간부터
비로소 작가는 이야기 속으로 첫발을 들여놓게 되는 거지
어…
이 문장 한번 들어봐, 음…
'훌쩍 떠나온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친구여'
'인간의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일까'
어떤 소설의 첫 문장인지 아는 사람?
몰라?
하, 이건 고전 중의 고전
괴…
누구냐?
이거 무슨 소리야?
죄송합니다
이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첫 문장이야
알다시피 베르테르가
친구 알베르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
넌 내 수업이 우습니?
하…
넌 내가 우스워? 응?
일어나
일어나
안 일어나?
나가!
내 수업에서 나가라고
알베르트 아니라 빌헬름인데요
뭐라고?
베르테르 친구는 빌헬름이라고요
알베르트는 베르테르가 사랑하는 여자 로테의 약혼자고요
베르테르가 질투하고
동경하고 열등감을 느끼는 대상?
그렇지만
우정 안에 그런 게 다 들어있다는 의미에서는
뭐, 어쩌면 친구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부러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친구
오~
교수님
시간 다 됐습니다
오늘 수업 끝
야, 일어나
야, 땡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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