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rst 200 lines.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김영민입니다
올해 제 나이는 스물일곱 살입니다
지금은 조그마한 출판사의 말단 샐러리맨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도스토옙스키 같은 대작가가 되어 있는
저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제가 지금 이러고 있느냐고요?
오늘은 제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제 나이에 벌써 인생을 얘기하기가 좀 건방져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누구나 그것이 남자든 여자든 한 번쯤은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곧 만나 뵙게 되겠지만 저는 미영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첫 영미 희곡 시간에 그녀를 봤을 때부터
전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전 누구보다도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는 제가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하는
제 인생에 있어서 아주 새로운 출발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 넘었는데 아직 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거 제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다시 한번 수정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우선 전화나 한 통 하고 오죠 그다음에 결정하겠습니다
아, 이 계집애 못 오면 못 온다고 얘기를 해야...
아이, 한 시간을 지나버렸어 어떻게 되는 거야, 이게
갑자기 중요한 일이 있다고 심각하게 얘기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헤어지자고 하는 걸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여지껏 잘 지내오다가 심각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
뭐, 헤어지자고 할 만도 하지
그렇게 졸라대도 여지껏 키스 한번 못 하게 했잖아
뭐, 할 수 없지 헤어지자면 헤어지는 거지, 뭐
어떻게 된 거야 3시에 만나기로 해놓고
무슨 소리야? 난 4시로 들었는데
3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난 분명히 4시로 들었다니까
3시였다니까
4시였다고
그래, 그래
4시였다고 치자
4시면 4시지 4시였다 치자가 뭐야?
그리고 영민 씬 언제나 자기만 옳은 줄 알고
남의 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사회생활 하는 데 있어서 꼭 고쳐야 될 단점이야, 어?
그래, 할 얘기 있다는 게 뭐야 중요한 얘기라면서?
응? 응
다름이 아니라
무슨 얘기든지 해봐 난 괜찮으니까
어
다름이 아니라 미영이 널 오늘 보자고 한 것은
지난 한 달 동안 잠도 못 자고 곰곰이 생각해서 결정한 건데
미영이 너도 잘 알다시피
나야 이제 겨우 출판사 말단 샐러리맨이잖아
세상엔 나보다 더 돈 많고 멋있는 남자도 얼마든지 있어
그래서 네가 좀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길 바라
그래 알았어!
생각하고 말 것도 없어 지금 당장 헤어지면 될 거 아냐!
- 아니... - 그래도
난 영민 씨가 마음도 따뜻하고
이해심도 많은 남자로 알고
좋은 친구로 여겨왔는데
이제 보니까 아주 치사하고 비겁한 사람이야
아니...
내가 싫어졌으면 싫어졌다고 솔직하게 얘기할 일이지
뭐? 날더러 얼굴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 찾아가라고?
뭐, 세상엔 누군 남자 친구 없어서 영민 씨 같은
말단 샐러리맨이나 만나는 줄 알아?
야, 김영민, 너
법학과 나와서 이번에 행정 고시 붙은 승철이 알지?
어, 승철이
오늘도 승철이가 자꾸 만나자는 것도 거절하고
- 응 - 여기까지 나왔단 말이야
응
이까짓 겨우 2천 원짜리 싸구려 목걸이
영민 씨가 사준 정성 봐서 달고 다녔는데
자, 가져!
감기 걸리셨군요?
주의하십쇼
환절기에 제일 먼저 찾아오는 손님은 반갑지 않은 감기죠
조제해 드릴까요?
요즘 감기는 웬만한 약 가지고는 떨어지기 힘들죠
아, 저, 저기, 그... 아, 그, 저...
아
알겠습니다
예
나이트클럽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목이 상하는 경우가 많죠
자, 여기 있습니다 성대 보호엔 용각산이 제일입죠
아니, 저 이, 이게 아니라
코, 코, 코, 콘...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콘택600
아, 그...
2천 원입니다
2천 원
아이, 그...
제가 깜빡 잊을 뻔했군요
아, 칠칠치 못한 자식
이런 거 미리미리 준비해갖고 다녀야지
제 친구가 오늘 이곳 해운대로 신혼여행 왔거든요
그런데 저를 급한 볼일이 있다고 불러내더니 글쎄
전쟁터에 나가는 녀석이 총알도 안 갖고 나가나?
이 친구가 집을 장만하기 전까지는 애를 갖지 않겠다는데요
콘돔 하나 주세요
엄마야? 나야, 나
미영이야 벌써 내 목소리 잊었어?
어디긴 어디야 호텔 방이지
아니 나 혼자 있어
김 서방? 영민 씨 말이야? 엄마는 징그럽게 김 서방이 뭐야
뭘 빠트렸는지 트렁크를 한 시간도 넘게 뒤적거리다 나갔어
몰라 뭐 빠트렸는지
응
엄마, 나 서울 그냥 올라갈까 봐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냥 기분이 이상해
꼭 대학 시험 볼 때처럼 오줌만 자꾸 마렵고
벌레가 있는지 몸이 간지러워 죽겠어
집 생각도 나고 무섭고 나 결혼 괜히 했나 봐
응
엄마도 그랬었어? 응
엄마, 나 없더라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 돼
아, 전홧값 내가 내는데 왜 엄마가 걱정이야?
아, 그래 알았어, 끊을게
신혼여행 오셨습니까?
예
축하합니다
저도 오늘 신혼여행 왔는데요
사실 시간만 좀 있었다면 해외로 나갈까 했는데
사랑해
미영
사랑해요 영민 씨
누구세요?
저 김영민입니다
뭐 해? 빨리 문 열어
안 돼
응, 속옷 차림이어서 부끄러워서 그렇지?
괜찮아 빨리 문 열어
안 된다니까
우리 이제 부부 사이인데 뭘 그래
응, 그것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마 내가 막 준비해 왔으니까
영민 씨, 미안하지만 오늘은 다른 데 가서 자
뭐야?
그냥 오늘만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그런 법이 어딨어?
혼자 있고 싶으면 뭐 하러 결혼했어?
왜 소리를 지르고 야단이야 어린애처럼?
아, 알았어, 알았어 조그맣게 얘기할게
너 기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명색이 소설 쓰는 놈인데 그런 거 모르겠어?
나도 너처럼 두렵고 떨리긴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너무 걱정 마
나 잘할 수 있어
아, 영화에서 본 것처럼 잘하면 될 거 아니야
암튼 오늘은 안 돼 다른 데 가서 자
엄마?
이제 보니 영민 씨가 전화했구나? 그래, 알았어
영민 씨
안 자?
아니
자
거기 춥지 않아?
응?
아니
영민 씨 나 사랑해?
응
진짜로?
응
고마워
응
영민 씨 침대로 와서 자 그 대신 잠만 자기야
응
영민 씨, 자?
어?
그냥 잘 거지?
아니
영민 씨 간지러워
어, 간지러워 영민 씨
왜 그래, 영민 씨 화났어?
끝났어
사랑해 미영
사랑해 미영
에이, 근데 그 김치찌개가 영 글러 먹었어
어휴, 추워
아니, 무슨 놈의 김치찌개가 그렇게 양파를 잔뜩 썰어 넣어 가지고
그게 무슨 김치찌개야? 양파 찌개지
김치찌개라고 하면은 시어 터진 김치에다 굵은 멸치 몇 개 넣고
펄펄 끓여야 시원한 게 제맛이지 말이여
그래도 설렁탕 맛은 구수하던데요
어이고 그게 구수해?
멀건 쌀뜨물에다 조미료만 쏟아부은 국물이 그게 구수해?
내일부터는 딴 집을 개발하든지 해야지
이게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말이여
저, 밥 좀 먹겠습니다
어, 먹어, 응
이야, 김 형이 제일 실속 있는데?
나도 내일부터 점심이나 싸갖고 다녀야겠어
신혼 때니까 다 저렇게 해주는 거지
우리 같은 고물들한테 어느 마누라가 새벽잠 설치고 도시락을 싸주겠어요?
아침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고 나오는 판인데
우리 저, 새신랑 도시락 검사나 한번 해볼까?
아이고, 이거 맛있는 거 많이 쌌네?
잘해주는 모양이지?
하루에 서너 번씩 해주나? 응?
어? 아, 이게 뭐랴 숫자도 아니고
손 치워 봐 '아이 루브 유'
'아이 루브 유'?
아, 이거 '아이 러브 유'인데 뭐 '아이 러브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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